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이 있다. 어느 장르건 새것이 등장하면 낡은 것은 관심에서 멀어지는 게 당연하다 여기면서도, 건축물조차 이 점에서는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은, 건축과 더불어 살아가는 이에게 꽤나 씁쓸하게 다가온다.
연달아 이런 의문이 든다. 건축은 무수한 시간과 노력의 축적의 산물이라 하였는데, 경제성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등에 업은 완공 건축물마저도 제 가치를 지켜내기 어려운 상황에서, 축적의 과정을 논하는 게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 물음이 무색하게도 ‘과정’을 기록하는 이가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과정 중에 사라진 것’들에 대한 기록이다. 공사장에 쌓여 있는 원자재, 타설 전의 철근 배근과 거푸집처럼 종국에는 사라지고 감춰져야 비로소 건축물이 되는 것들 말이다.
설계와 감리를 하며 거의 모든 순간을 사진에 담는 저자는, 사진을 통해 공사장의 익숙한 무료함을 특별함으로 바꾸는 마법을 보여준다. 삭막하고 황량한 공사장을 아름답고 정갈하고 따뜻함이 넘쳐나는 곳으로 변화시키는 그야말로 놀라운 마법이다. 그는 공사장의 온갖 요소들을 생명력 넘치는 풍부한 색감과 다양한 공간 구성을 갖춘 독특한 사진을 통해 추상화함으로써, 완결된 오브제로서의 아름다움과 사라진 시간들의 따뜻함을 증명하는 이미지로 존재케 한다.
책은 세 개의 파트로 구성된다. ‘Yellow’, ‘Blue’, ‘Black & White’, 그가 찍은 사진에서 가장 많이 포착한 세 가지 컬러를 주제로 삼아, ‘건축물 없는 건축사진’들을 통해 이야기를 만들어 나간다.
파트 1, ‘Yellow,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에서는 채 다듬어지지 않은 목재의 단면, 비 온 뒤 배수가 잘되지 않아 생긴 진흙탕, 바퀴 자국과 발자국으로 다져진 흙길 등, 현장 곳곳에서 찾아낸 다채로운 노랑을 담아내며, 건축물이 완성되기 전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날 것의 아름다움을 되새긴다.
파트 2, ‘Blue, 꿈이 탄생하던 순간을 기억하다’에서는 흘러가는 구름, 하늘을 높이 가로지르는 크레인, 기하학적인 격자무늬를 그리는 철근들을 통해, 땅의 풍경만큼이나 푸른 하늘 또한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음을, 변함없는 것은 오직, 땅을 딛고 서서 하늘을 향해 렌즈를 들어 올리는 나이 든 소년의 순수한 시선뿐임을 고백한다.
파트 3, ‘black & white, 경계에 선 모든 사람들에게’에서는 알록달록한 이야기가 가득 담길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한 건축 현장에서의 고군분투를 다루며, 그 안에 속해 있는 수많은 발걸음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전한다.
“사람들은 완성된 건축에서 생활하지만, 결과물은 과정 중에 사라진 것들의 축적임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과거에 내가 했던 일들로 지금의 내가 있고, 지금 내가 하는 일들로 나의 미래가 결정되듯, 공사장의 다양한 과정들이 있어 지금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것들을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이 책에 담긴 모든 건축물은 완공되었고 사진 속 풍경과 오브제는 이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분명 뜨겁게 존재했으나 지금은 사라져 버린 풍경들, 그 안에 실재했던 사람들의 기억에서조차 매일의 평범한 일상 중 하나로 잊힌 장면들이다. 그러나 저자가 책 머리에서 건넨 말처럼, 이 책을 읽는 순간만이라도 그 장면에 오롯이 빠져들 수 있다면, 건축의 현장이 이토록 아름다운지 새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동안 놓쳤던 많은 장면을 일깨우는 행운은 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