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전통건축은 흔히 비움의 미학이라는 말과 깊은 연관이 있다. 백색 종이 위에 넘치지 않게 그어진 먹선이 만들어내는 수묵화 한 점만 보아도 그 뜻을 헤아릴 수 있다. 우리에게 비움의 공간, 무의 공간이란 자연과 어우러지는 과거 선비들의 모습에서부터 이어져 온 것이다. 파빌리온이라는 단어가 익숙해진 지는 오래되지 않았지만, 이 공간의 개념은 왠지 낯설지 않다. 과거 선비들이 자연 속에서 정신적 수양을 이루고 풍류를 즐기던 공간인 누정은 서양의 파빌리온이 가진 개념과 비슷한 맥락을 가진다. 이는 단순히 여가와 유흥을 즐기던 장소가 아니라 문화와 이상향이 담긴 공간이었다. 트인 공간 속에서 서로 나라의 형국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며 더 나은 정치 방향을 탐구하곤 했다.
이 책은 천막부터 누정, 현대미술에서 팝업 스토어까지 다양성과 깊은 역사성을 지닌 파빌리온을 재발견하는 흥미로운 책이다. 파빌리온의 문화사, 이 땅의 파빌리온 역사, 건축, 미술, 디자인계의 핫이슈가 된 오늘의 파빌리온까지 거의 모든 면을 이야기한다. 『랜드마크; 도시들 경쟁하다』의 저자 송하엽, 시인이자 건축가인 함성호, 카이스트 인문학부의 조현정 교수, 국립현대미술관 큐레이터 이수연, 경복궁 옆 국립현대미술관에 ‘신선놀음’이라는 파빌리온을 설치한 건축가 최장원 등 파빌리온에 관해 할 말 있는 저자 11명이 함께 썼다.
이 책에서는 파빌리온의 원시적인 모습, 그늘 가리개 용도의 보자기 형식부터 정원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공간, 텐트와 캐노피의 감성적인 공간에 대한 이해를 시작으로 이와 비슷한 맥락의 구조물인 폴리에 관해 설명한다. 이 구조체들은 감성적 향유를 즐기기 위한 공간에서 시작해 임시 건물이 가지는 특유의 시간성, 유동성으로 사회 문제에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공공 기능이 더해졌다.
파빌리온은 제한된 시간성을 가지기 때문에 건축가의 생각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는 최적의 건축물이 된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진행되는 젊은 건축가프로그램의 파빌리온을 보아도 건축가들은 매년 독특한 개념과 상상력으로 도심 속에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낸다. 이 공간은 사람들에게 예측할 수 없는 즐거움을 주지만 파빌리온이 지닌 감정이 항상 아름답지만은 않다. 점점 최첨단의 기술, 신재료가 합쳐진 디자인으로 발전할수록 역사가 가진 기억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남겨진 커다란 과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