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전효진 차장
기사입력 2023-04-18
필경사
건축가 심훈의 꿈을 담은 집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문인 중 한 사람인 심훈. 그의 이름 앞에는 다양한 수식어가 붙곤 한다. 시와 소설을 쓰는 작가이자 신문사와 방송국에서 활동하는 언론인이었으며 영화감독이기도 했던, 그야말로 종합 예술인이었던 까닭이다. 그런 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또 하나의 수식어가 있다. 바로 건축가다.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상록수길 97에 위치한 20평 규모의 초가집 ‘필경사’ 또한 심훈이 남긴 유산이기 때문이다. 평생 한국의 주택을 연구해 온 건축가 임창복이 심훈의 건축가적인 면모를 조명하고, ‘상록수’를 비롯한 1930년대 건축 사료를 바탕으로 ‘필경사’의 자취를 낱낱이 추적한 책이 출간됐다.
흔히 초가집은 낙후된 농촌의 상징으로 여겨지곤 한다. 이름 없는 민초들에 의해 지어졌으며, 그러다 보니 무언가 뒤떨어진 이미지, 누추한 환경의 대명사가 된 것도 그럴 만하다. 그러나 ‘필경사’는 가난하고 낙후된 주거 환경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강렬하고 당당한 인상을 풍긴다.
정면 5칸, 측면 2칸. 총 10칸 규모로 지어진 ‘필경사’는 한 칸당 가로세로 2.5m 모듈로 이루어진 총 62.5m2, 약 20평짜리 집이다. 규모는 소박하지만 세부 디테일을 살펴보면 곳곳에서 과학적이고 모던한 감각이 풍긴다. 지붕은 초가지붕인데 정면에는 격자무늬 유리창이 보이고, 서재와 생활실의 입식·좌식 생활 방식에 따라 창의 높이도 각각 다르다. 뿐만 아니라 주택개량 운동이 한창이던 1930년대, 건축가들은 화장실을 집 안으로 들이고 부엌은 집 후면으로 보내는 등 편리한 생활 공간을 구상했는데, 필경사의 공간 배치도 이러한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경성의 문화주택과 달리 창고까지 둬 ‘농가’로서의 성격을 확고히 했다.
저자는 이러한 ‘필경사’를 ‘당당한 초가집’이라 부르며, 시골에서 보던 왜소한 초가집들과는 다른 분위기, 근대적 생활 양식을 담고자 고민한 흔적, 그리고 무엇보다도 집을 설계하여 지은이가 누군지 밝힌 그 당당함에 매료되어 ‘필경사’와의 긴 인연을 이어가게 됐다고 말한다. 그리고 총 다섯 개의 챕터를 통해 ‘필경사’와 연관 지어 심훈의 정신과 당대의 건축 사조까지 찬찬히 살펴본다.
서두에서는 심훈의 대표작 ‘상록수’의 내용을 되짚으며 ‘필경사’와의 관계를 추리한다. 심훈이 어떤 경위로 경성 생활을 접고 당진에 집을 짓게 됐는지, 이 집에는 어떤 꿈과 의미가 담겨 있는지를 말이다. 그리고 저간의 사정을 알고 난 뒤 ‘상록수’를 다시 읽으면, ‘집’을 지으며 전개되는 농촌 계몽 운동 이야기인 이 소설은 곧, 필경사 건축 보고서와 다름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이러한 배경 이야기도 흥미롭지만, 역시 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필경사’의 건축적 의미다. 저자는 일제강점기 지식인들이 주장했던 생활개선 운동과 주택개량 운동, 문화주택에 대한 논쟁 등을 소개하면서 필경사가 태동하게 된 배경을 두루 소개한다. 필경사를 여러 차례 답사하며 찍은 풍부한 사진들은 1930년대 중반의 새로운 생활 공간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보조 자료가 된다.
농민의 삶을 담은 과학적이고 실용적이며 사회적 가치까지 지닌 집. 일제 식민 치하, 자본주의 도시의 착취로 날이 갈수록 피폐해지던 농촌의 계몽과 자주 국가로의 발전까지 꿈꾸던 그의 정신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집. 그 집의 흔적을 이 책을 통해 만나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