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
땅은 도로 바로 아래로 야트막하게 펼쳐져 있다. 지척에 두고 있는 바다를 향해 엎드리듯 기울어져 있는 경사지다. 겨울이면 하얀 눈으로 덮이고, 이듬해 봄이 다가오면 여전히 꽁꽁 언 채 보리 파종을 기다리는 곳이다. 땅은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며 나지막하게 흐르는 바다를 하염없이 봐 왔을 것이다. 낮은 자리에서 미동도 없어 보이는 모습으로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바다를 닮으려고 한 것도 같다.
대지와 바다의 형태를 거스르지 않고 자신 또한 한껏 낮춘 몸짓으로 건축이 앉아 있다. 뒤로 나 있는 도로보다 나지막하여 마치 지형의 일부처럼 깔려 있다. 청녹색 카페트처럼 땅을 덮는 보리밭도, 그 너머 화폭 같은 서해와 하늘의 표정도, 대지를 훑고 떠도는 바람도, 어느 것 하나 가리지 않는다. 아니, 그들이 잠시 정체하는 플랫폼처럼 비워져 있는 평지붕 위로 그들을 불러들이는 모양새다.
서해안의 해안 절벽을 감상할 수 있는 영광의 백수해안도로 한 켠에 위치한다. 해안도로 가장자리에서 바라보이는 풍경은 흔히 짐작되는 서해안의 여느 해수욕장들과 사뭇 다르다. 직접 봐야만 경험할 수 있는 그 운치를 공공의 자산으로 만들고자 했던 모양이다. 어떤 건물이든지 해안도로에서 바다로의 조망을 가리지 못한다는 건축 규정이 생겨난 것을 보면 틀림없다. 따라서 도로보다 높아지지 않으려면 주어진 대지에는 오로지 단층 건물만 지을 수 있는 상황이다. 규정이 건물을 나지막하게 앉히는 최고의 명분이 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땅의 위치, 주변 풍경, 조망 등을 고려해 봤을 때에도 단층의 낮은 공간은 환경과 가장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모습이라는 생각이 든다.
건축은 도로에 최대한 가까우면서 낮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덕분에 전면에는 널찍한 여유 공간이 생겨나 있다. 건축주는 정원으로 꾸미고 싶어했지만, 기존부터 자리하던 봄날의 청보리밭이야말로 그 어느 정원에 비해도 손색없고 지속가능한 목가적인 정취를 자아내기에 고스란히 지켜지고 있다. 특히나 보리는 영광군의 특산품 중 하나로 장소성을 상징하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보리밭이 지켜지는 대신, 밭 주변으로 시골길 같은 분위기의 산책로와 더불어 최소한의 조경만 추가되어 있다.
건물 초입에 서면 양면 콘크리트 벽으로 이루어진 기다란 복도형 길을 마주하게 된다. 건물을 두 개의 공간으로 나누는 사이 공간으로, 특별한 또 하나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대지 안의 경계선을 기점으로 대지는 두 가지 용도를 갖고 있는데, 기다란 복도형 진입로는 용도 경계선을 따라 낸 사잇길이다. 막혀 있는 이 길의 코너를 도는 순간, 보리밭 너머 바다라는 기대 이상의 풍경을 맞이하게 된다.
멋진 풍경을 바라보자니 자연스레 전면에 긴 창이 배치되고, 대지의 경사에 순응하다 보니 내부의 바닥이 두 개의 높이로 나누어져 있다. 투명한 창과 데크는 보리밭과 바다와 하늘로 환하게 열린 눈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청정한 자연과 낙조의 오묘한 색감을 그대로 흡입하고 투영해 내기도 한다.
작품명: 보리 / 위치: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읍 대신리 / 설계: 아키후드 건축사사무소 (강우현, 강영진) / 설계담당: 김석민, 유창희 / 시공: 태연디앤에프건설(주) / 구조설계: S.D.M 구조기술사사무소 / 기계설계: 선화기술단사무소 / 전기설계: 선화기술단사무소 / 조경: 리스케이프 / 용도: 소매점 / 대지면적: 1.684m² / 건축면적: 225.9m² / 연면적: 225.9m² / 건폐율: 13.41% / 용적률: 13.41% / 규모: 지상 1층 / 높이: 3.41m / 구조: 철근콘크리트조 / 외부마감: 노출콘크리트 / 내부마감: 수성페인트, 콘크리트 하드너 / 완공: 2021년 / 사진: 박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