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전효진 차장
기사입력 2023-03-27
구마 겐고, 나의 모든 일
요즘 같은 무한 경쟁 사회에서 승패를 가르지 않는 유일한 장르는, 작가의 창작성 자체로 가치를 인정받는 ‘예술’이 아닐까. 그럼 흔히 ‘종합예술’이라 부르는 건축은 어떨까. 미술, 음악, 공예, 조형 등 건축은 다양한 순수 예술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어떤 예술보다 현실에 민감하다. 부지와 자본은 한정적이고 프로젝트도 무한하지 않은 탓이다.
작가성을 인정받기 위해 작품을 내놓는 과정부터가 이미 경쟁이다 보니, 많은 건축가들이 더 화려한 건축, 눈에 띄는 건축, 주변 건물들을 이기는 건축을 추구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꿋꿋이 정반대의 철학을 지켜온 건축가가 있다. 작고, 낮고, 느린 건축, 일명 ‘삼저주의 건축’을 추구하는 구마 겐코다. 자본주의 경제 논리에서 움직이던 지금까지의 건축과 결별하고, 이기는 건축이 아닌 ‘지는 건축’을 통해 새로운 공공성이 무엇인지를 보여줘 온 그가, 지금까지 걸어온 발자취를 정리한 책 ‘구마 겐고, 나의 모든 일’을 출간했다. 총 55개의 작업물을 통해 40여 년 간의 활동을 돌아보며, ‘삼저주의’ 철학은 어디서 비롯되어 어떻게 무르익어 지금에 이르게 됐는지 살펴보는 책이다.
책 서두에서 구마 겐고는 “건축가는 장거리 주자처럼 달려야 한다”고 말한다. 마라토너에게 체력, 주력, 정신력이 필요하듯, 건축가 역시 긴 세월 같은 속도로 꾸준히 달려가려면 세 가지 힘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자신 역시 이를 위해 세 개의 바퀴로 구성된 ‘삼륜차’ 방법을 평생에 걸쳐 실행하고 있다고 밝힌다. 첫 번째 바퀴는 ‘대형 프로젝트’, 두 번째 바퀴는 ‘소형 프로젝트’, 마지막 세 번째 바퀴는 ‘글쓰기’다. 여러 사람의 이해관계가 얽힌 대형 프로젝트, 자신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자유롭게 발신할 수 있는 소형 프로젝트, 그리고 건축은 어떠해야 하는지 다시금 돌아보게 하는 글쓰기, 이 세 가지 바퀴를 통해 자신의 건축적 철학을 다져왔다고 말이다.
그의 건축 발자취는 크게 네 개의 시기로 구분된다. 1기는 사무실을 시작했던 1986년부터 일본의 버블 경제가 무너지며 모든 일이 취소되었던 1991년까지 5년 간이다. 시대 상황과 곁들여 풀어 놓은 유년기와 학창 시절의 얘기들을 통해, 그가 어떤 태도로 건축을 대했으며 자신만의 철학을 형성하기 시작했는지 살펴볼 수 있다. 첫 저서인 ‘열 가지 스타일의 집’, 첫 주택 설계 작품인 ‘이즈의 후루고야’, 청년 구마 겐고를 상징하는 ‘M2’ 등의 작업물이 수록되어 있다.
2기는 1992년부터 2000년까지의 작품을 다룬다. 버블 경제가 붕괴하고 일본이 최악의 경기 침체를 겪던 ‘잃어버린 10년‘이라 불리던 시기로, 구마 겐고 역시 도쿄에서 일을 전혀 할 수 없게 되어, 지방을 다니며 조용히 일을 이어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현지의 재료 사용법을 배우고, 지역 기술자들과의 협업을 통해 작은 건축의 즐거움을 발견하게 된다. 대형 프로젝트는 없었지만, 그는 이 시기를 ‘재생의 10년’이라 부르며 가장 그립고 감동이 있던 시기라 회상한다. 매장된 전망대라는 역설을 제시했던 ‘기로산 전망대’, 형태와 구조를 최소화했던 ‘나카가와마치 바토 히로시게 미술관’, 지역의 재료를 사용하고 지역 기술자들과 힘을 모아 신공법을 시도했던 ‘돌 미술관’ 등 주로 지방에서 이뤄진 프로젝트들을 만나볼 수 있다.
3기는 2001년부터 2015년까지로, 2기 시절에 지은 작은 건축물들과 당시 정립한 그의 건축 철학이 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으며, 구마 겐코라는 이름이 전세계로 알려진 시기다. 바쁘게 활동하며 많은 대표작들을 남겼지만, 동시에 9.11 테러와 동일본 대지진 등의 참사가 벌어진 비극의 시기이기도 했다. 그는 이러한 비극을 통해 건축의 나약함을 깨닫고, ‘삼저주의 건축’ 철학을 더욱 확고히 하게 된다. 그 결과 ‘대나무집’, ‘유스하라 나무다리 박물관’, ‘스타벅스 다자이후 덴만구 오모테산도점’, ‘서니힐즈 재팬‘ 등, 목재와 전통 디자인을 활용해 구마 겐코 특유의 색깔이 묻어 나는 작품들이 대거 등장하게 됐다. 대표 저서인 ‘지는 건축‘도 이 시기에 출간했다.
마지막 4기는 2016년부터 현재까지를 다룬다. 3기가 마라토너가 급수대에서 물잔을 들어 페이스를 조절하며 달리는 단계라면, 4기는 자신의 페이스를 확립하고 꾸준히 달리는 단계라 할 수 있다. 실로 현재도 1기부터 실행해왔던 ‘삼륜차’ 방법을 고수하며, 대형프로젝트, 소형프로젝트, 글쓰기로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하고 있다. ‘쥬바코’, ‘사카이마치의 작은 건축 거리 만들기’ 등의 소형 프로젝트부터, ‘도쿄 올림픽 국립 경기장’, ‘V&A 던디’ 등의 대형 프로젝트들까지 규모와 국가를 넘나들며 다양한 프로젝트를 선보이는가 하면, 2020년 저서 ‘점·선·면’을 출간하며 글쓰기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구마 겐고는 건축도 사람처럼 태어나, 나이 들고, 죽고, 썩기 마련이라고 말한다. 건축은 분명 인간이 만들어낸 문명의 결과물이다. 하지만 그는 건물이 사람과 자연, 사람과 사람, 사람과 세계를 연결하는 다리이자 터널이라 생각하며, 건축을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또 하나의 생명체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철학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며 오늘도 ‘약한 건축’을 만들어가고 있다. 관계와 지속을 추구한 그의 새로운 건축 철학을 이 책을 통해 만나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