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만의 시각이 담긴 쉽고 편안한 글로 대중에게 건축의 매력을 전해온 건축평론가 이용재(1960~2014). 그가 지난 6월 8일 급성패혈증으로 별세했다. 향년 54세.
건축인이란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도 성장해가는 이들이라 하기에, 그간 해온 일보다 앞으로 해나갈 일들이 더 많았을 그의 이른 사망 소식은 더욱 안타깝다.
명지대학교 건축학과 대학원을 졸업한 고인은 1986년『건축과 환경(현 C3)』기자로 입사, 건축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삼 년간 본지의 취재기자로서 한국 건축계의 최전선을 누비다가, 돌연 건축전문 출판사를 설립하고 사업에 뛰어들게 된다. 그러나 운영이 여의치 않자 1993년에는 건축 현장으로 발걸음을 돌렸으며, 긴 방황 끝에 2000년, 건축잡지『플러스』의 편집장으로 복귀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또 한 번 잡지사를 떠나 건축 감리가 되어 현장으로 돌아갔고, 그 생활마저 길게 이어지지 못하자 택시운전사라는 새 직업을 갖기로 한다. 파란만장한 인생 여정에 한 획을 더하는 파격적 전업이었다.
그 종잡을 수 없는 행보로 인해 건축계를 영영 떠나는 게 아니냐는 주변의 우려섞인 관심을 받았지만, 되려 그의 발걸음은 택시와 함께 더욱 자유로워졌다. 평일에는 생계를 위해 택시를 몰았고 주말에는 당시 중학생이던 딸과 함께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건축 답사를 시작한 것이다. 건축은 인문학의 정수이자 기초이며 제대로 지은 집이 인재를 길러낸다고 믿어왔던 그다운 교육법이었다. 그리고 그 평범치 않은 답사기를 엮은『딸과 함께하는 건축 여행』을 출간하며 건축평론가이자 저자로서의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그간 출간한 저서만도 십여 권. 고건축물부터 현대건축물까지, 거의 모든 종류의 건축물들을 편안하게 소개한 그의 저서들은 건축인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으며 그를 인문학적 건축평론가로 발돋움하게 했다.
그런 고인이 사망 직전까지 온 열정을 기울였던 프로젝트는 바로 ‘인문학적 집짓기’다. 소위 집 장사들의 집이 전국을 점령한 데 반기를 든 야심 찬 기획으로, 건축주가 건축가를 선택하면 그가 총감독을 맡아 기획부터 설계, 시공, 감리, 인테리어까지 집짓기의 전 과정을 책임지는 것이다.
건축가의 집은 비싸다는 편견도 이 프로젝트에서는 예외다. 그의 블로그에 명시된 단가는 평당 600만원(지방 650만원). 집 장사들의 집과 비교해도 별반 차이가 없다. 일의 투명성을 위해 공사 과정과 공사비 내역은 블로그에 수시로 업데이트 하고, 완공 후 1년 간은 무상 사후관리까지 약속했으니 건추주로서도 손해볼 일 없는 시스템이다.
그렇다고 건축가에게 무작정 재능 기부를 강요하지도 않는다. 합리적인 댓가를 지불하고, 건축주의 의견은 충분히 수렴하되 설계는 건축가의 고유 영역으로 인정해, 오히려 건축가들이 마음놓고 창작활동에 몰입할 수 있게 해주니 그아말로 참여한 이들 모두에게 득이 되는 윈윈 프로젝트다.
그와 함께 처음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건축가는 모두 열 명. 배경도 활동 기반도 전문분야도 다르지만, 누구보다 인문학적이고 인문학적 건축을 구현하겠다는 가치를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는 소신 있는 건축가들이다. 2012년 5월, 1호 군산 주택 리모델링을 시작으로, 2호 공릉주택 리모델링, 3, 4, 5호 진주 석류나무집, 지난해 말 완공된 6호 창원주택까지, 약 2년 여 동안 여섯 개의 인문학적 집이 탄생했다. 그리고 지난 5월 27일 일곱 번째 판교 주택의 계약을 끝으로, 그는 이 땅을 인문학적 집으로 채우기 위해 항해 중이던 인문학 호의 선장 자리를 내려놓았다.
생전 고인이 지목한 두 번째 선장은 진주 석류나무집을 계기로 그와 의기투합한, 건축가 이승용 아름다운 우리家. 그는 “그 동안 집 짓기를 함께 해온 이들과 함께, 존경하고 사랑하는 고인의 뜻을 잘 살려 변함 없이 진행될 것”이라며 앞으로의 계획을 전했다. 100호를 향해 내디뎠던 그의 걸음은 멈췄지만, 인문학을 통해 좋은 집을 만들겠다는 취지는 그와 함께 했던 인문학적 건축가들이 계속해서 이어나갈 것이다.
글 / 전효진 기자, 사진제공 / 이승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