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글 전효진 차장, 정영진 기자 편집 조희정
“조경은 땅에 쓰는 시입니다. 보는 이의 가슴에 울림을 줍니다. 무지개를 보면 가슴이 뛰듯.. 우리가 섬세하게 손질하고 쓰다듬으며 가꾸는 정원이 치유와 회복, 영감의 원천이 되길 바랍니다.” – 정영선
한국 1세대 조경가 정영선의 삶과 작품 세계를 조명한 전시 <정영선: 이 땅에 숨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가 4월 5일부터 9월 22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다.
60여 개 프로젝트에 대한 아카이브 자료들 500여 점을 통해 반세기 동안 한 명의 조경가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고, 그 시간 속에서 무르익은 그의 사유를 바탕으로 우리 모두가 꿈꾸는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의 모습을 함께 그려보고자 기획된 전시다.
이러한 취지에 대해 작가는 개막 전날 열린 언론공개회에서, 자신에게 조경은 ‘생태적 질서에 부응하는 방법론’이기에 늘 땅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태도로 작업해 왔다며, 이번 전시가 그간 건축과 토목에 가려져 상대적으로 주목 받지 못했던 조경이 사실은 우리 모두의 일상에 아름답게 녹아 있었음을 알아차리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는 소감을 전했다.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전시는 서울관 지하 1층, 7전시실에서 이뤄진다. 입구에는 작가 인터뷰 영상과 간략한 소개 자료도 비치되어 있다.
어린 시절부터 조경에 남다른 애정을 지녔던 정영선은, 조경학이 국내에 처음 소개된 1970년대 초,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에 1기로 입학한다. 그리고 대학원에 재학하는 동안 불국사와 현충사 등 문화재 복원 프로젝트에 참여할 기회를 갖게 되는데, 이러한 국가 주도의 공공 프로젝트 경험이 바탕이 되어 1977년에는 ‘충북 공원묘지 계획’으로 본격적인 조경 실무를 시작하게 됐다. 이후로도 ‘국립수목원’, ‘아시아공원’, ‘예술의전당’, ‘올림픽선수촌아파트’ 등 다수의 굵직한 프로젝트들을 수행했으며, 1987년 서안 조경설계사무소를 설립하면서부터는 더욱 활발하게 공공과 민간을 넘나들며 활동 범위를 한층 더 확장했다.
전시장 입구 외벽에는 이러한 작가의 반세기에 걸친 작업들을 정리한 연대표가 새겨져 있다. 단순히 작품 목록을 늘어놓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한국 조경사의 큰 사건들을 병기함으로써, 거시적인 측면에서 그의 작품이 지닌 사회적 가치를 함께 확인해 볼 수 있다.
전시장으로 들어서면 상, 중, 하, 모든 공간이 활용되는 밀도 높은 전시가 펼쳐진다.
중앙부에는 네 면의 벽을 활용해 다양한 작품들을 빠르고 간략하게 훑어볼 수 있도록 사진 자료들이 중점적으로 배열됐다. 상부에는 전시장을 사각으로 띠처럼 두른 대형 스크린에서 조경의 시간성을 담아낸 파노라마 영상이 흘러나온다.
관람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건 전시장 하부, 바닥이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사각 연못을 모티브로 삼은 것인데, 작가가 강조해 온 ‘지사地史적 맥락’, 즉 우리 땅의 이야기를 방법론적으로 풀어낸 결과물이기도 하다. 고개를 숙이고 정원을 거닐듯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다가, 흥미로운 작품을 발견하면 잠시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집중하다보면, 어느샌가 작가가 일궈온 조경의 세계에 빠져들게 된다.
전시는 크게 일곱 묶음으로 구성된다. 작업의 주제와 성격에 따라 수많은 자료가 짜임새 있게 펼쳐지지만, 그렇다고 관객에게 특정한 깨달음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정영선의 조경이 그러하듯 경계가 느슨한 최소한의 구획을 통해, 관객이 서 있는 자리에서 각 프로젝트의 맥락을 스스로 찾아가게 하는 전시다.
패러다임의 전환, 지속 가능한 역사 쓰기
정영선은 땅의 기억과 역사를 기념하는 장소를 만든다. 그의 작업은 건물과 주변 환경을 연결할 뿐 아니라, 공간에 정체성을 부여한다. 국가의 상징적인 땅 여럿이 그의 손을 거쳐 새로운 장소성을 지니게 되었다. 똑같이 기념비적인 중심축이 필요했던 곳들이더라도, 그가 제시한 설계안에는 맥락에 따른 차이가 드러난다.
일제강점기 유일하게 조선인의 자본으로 건설된 철길을 공원화한 ‘경춘선숲길’2015-2017은 역사를 기념함과 동시에, 이웃 공동체와 지속가능한 방법으로 관계 맺음으로써 조경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한 작업이다. 학예연구사 이지회는 언론공개회에서 “철길이 끊긴 뒤 수년간 버려진 곳은 이미 주민들의 텃밭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작가는 이곳을 더 생산적이게 바꾸면서도 철길이란 물질성을 남겼다. 대합실에 있던 의자를 밖으로 꺼내 놓은 것도 그래서였다.”고 언급했다. 나란히 배열된 현장 전경 사진과 설계 도면을 둘러보면서, 수직에서 수평으로, 채움에서 비움으로 인식의 전환을 시도했던 과정을 따라가 본다.
세계화의 시대, 한국의 도시 경관
서울 아시안 게임, 서울 올림픽, 대전 엑스포 등 주요 국제 행사가 개최될 때면,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에게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도시 경관을 알리기 위해 으레 조경이 동원되곤 했다. 서울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한 이후 교직에 몸담고 있던 정영선은, 80년대 중후반 이러한 프로젝트들이 늘어남에 따라 서안 조경설계사무소를 창설하고 본격적으로 현장에 뛰어들게 된다. 작가는 조경가로서 미래 도시 모습에 관해 비전을 제시하고, 개발 사업에 땅의 논리를 연결하려 노력했다.
국내 최초의 담 없는 공원으로 잘 알려진 ‘아시아선수촌 아파트, 아시아공원’(1986)은 약간의 둔덕을 만들어 공원과 도시를 유기적으로 연결시킨 사례로, 지금까지도 도심 속 휴식처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대전 엑스포 박람회장’(1993)에서는 대규모 복합 건축물 옥외 공간에 현대적이면서도 한국적 색채가 드러나는 디자인을 선보였다. 국가 경제와 기술 발전에 이바지할 중요한 프로젝트였던 만큼 스케치와 상세 도면 등 비교적 많은 자료가 남아있어, 대규모 국가사업에서 아이디어가 현실로 구현되기까지의 과정을 상세하게 살펴볼 수 있다.
자연과 예술, 그리고 여가 생활
1980년대, 경제가 성장하고 생활 방식이 변화하면서, 여가 장소에 대한 필요성이 사회 전반에 대두했다. 예술, 교육, 체육, 관광 등 다양한 문화, 레저시설이 건설됐고, 정영선은 이러한 시설들의 조경을 맡아, 각각의 기능과 목적에 충실하면서도 우리 고유의 지형과 땅의 맥락을 살린 경관들을 만들어 왔다. 이 섹션에서는 맥락을 토대로 설계한 작품들, 때문에 심미성과 더불어 자생력까지 갖춘 프로젝트들이 소개된다.
‘어린이대공원 환경공원’(1998)과 ‘예술의 전당’(1998)에서는 건축과 대지의 관계를 면밀히 검토한 뒤, 전자에는 ‘미래 세대의 환경 교육을 위한 학습장’, 후자에는 ‘예술과 문화 증진의 공간’이라는 목표와 기능을 부여해 각각의 특색이 드러나는 조경을 완성했다. 또, ‘도투락월드’(1990)를 시작으로 ‘휘닉스파크’(1995) 등 스포츠 시설과 접목된 산악형 리조트도 다수 진행하며, 국토의 80%가 산으로 이루어진 한국 지형에 맞는 휴양지의 원형을 만들어갔다. 학예연구사 이지회는 “예술의 전당 마스터플랜을 집중해서 보면 산세 지형을 어떻게 해결했는지 알 수 있다. 상세도에서는 돌의 형태, 물의 흐름 등 아주 상세한 것들에 대한 고민을 발견하게 된다.”고 덧붙였다. 이 밖에도 현재 진행 중인 인문학 레지던시 ‘두내원’(2025 예정)의 계획안을 산책로 개념스케치와 함께 소개된다.
정원의 재발견
정영선은 한국 전통 정원 요소를 조경 작업에 적극적으로 도입해왔다. 우리 고유의 식재와 경관, 공간 구성 방식은 작가가 직접 발로 뛰고 연구하여 알아낸 것들이다. 그의 정원은 땅의 생김새와 성격에 부합하는 바라봄의 경험과 경치를 조망하는 수행적 요소에 가치를 둔다. 자연의 아름다운을 읽어내고 나와 관계 맺게 하는 차경의 원리, 경치를 빌려오는 전통 정원의 중요한 원칙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또한, 나무나 꽃을 식재할 때는 관상적 가치를 넘어 생태적 특성과 형태, 나아가 식물에 내재한 의미를 고려한다. 동시에 우리 들과 산에 자생하는 야생화와 수목을 주로 심어, 마치 저절로 이루어진 듯한 정원을 추구해 왔다.
작가가 이러한 전통 정원의 요소를 본격적으로 구사하게 된 것은 호암미술관의 ‘희원’(1997)부터다. 조경가 개인으로서 민간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전환점이기도 했고, 정원이 조경 분야에 중심 영역으로 자리 잡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전시장에 놓인 희원의 모형을 보면, 땅의 높낮이에 따라 경관과 길을 낸 방식을 생각해 보게 된다. 모형 맞은편에 걸린 사진을 통해서는 돌 정승과 벅수 등의 석조물들이 정원의 일부로 녹아 들어 있는 장면도 만나볼 수 있다. 그 옆으로 중국 광저우시에 한국정원만의 독특한 운치를 소개하고자 한 작업, ‘해동경기원’(2006) 전경 사진이 이어진다.
조경과 건축의 대화
조경가와 건축가는 유기적으로 협업한다. 개인 주택의 작은 정원부터 섬 전체의 경관까지, 땅의 조건을 읽고 이를 토대로 공간을 구축하는 과정에는 조경과 건축의 내밀한 상생 작용이 이어진다. 설계자들은 여러 규모의 작업을 통해 대지와 사람의 관계를 치열하게 고민한다는 점에서 같은 맥락을 공유한다. 이 챕터에서는 정영선과 함께했던 여러 건축가들 중에서도 두 분야의 협업이 돋보였던 작품들을 소개한다.
너른 녹차밭과 함께 지어진 ‘제주 오설록’(2011, 2023)의 네 개의 건축물 사이에는 제주 특유의 오름 지형과 곶자왈 숲이 마련됐다. 특히 ‘티스톤’에서는 캔틸레버를 통해 어떠한 방해도 없이 건축물과 어우러지는 절경이 연결된다. ‘사우스케이프’(2018)는 클럽하우스와 호텔 사이 돌산을 깎아내어 남해 군도 경관을 조망하게끔 한 작품이다. 인공적으로 깎아낸 돌 틈 사이 풀을 심어 바람을 타고 온 씨앗이 자연히 자라난 모습이다. 산을 교과서 삼아,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여 최대한의 조화를 이룬다.
하천 풍경과 생태의 회복
정영선은 한강 상류의 두물머리부터 하류에서 바다와 만나는 곳까지 다수의 프로젝트를 통해 하천 환경 개선에 힘썼다. 강이 흐르는 곳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습지를 보호하고 도심 속 물의 중요성을 환기했다. 강의 생태권 회복을 통해 여러 생명체들이 보금자리를 잃지 않도록, 콘크리트로 뒤덮인 도시에 수공간을 주입했다.
빌딩 숲 사이 야생적인 숲과 습지를 경험할 수 있는 ‘여의도샛강생태공원’(1997, 2007)과 산업 시설물이던 정수장을 수생물을 통한 자연정화의 장소로 재탄생시킨 ‘선유도공원’(2002)이 대표적이다. 언론공개회에서 이지회 학예연구사는 “과거 여의도 샛강은 비가오면 홍수가 나 골치를 썩인 탓에 콘크리트로 매워질 뻔했으나, 정영선 작가의 결사반대로 지금의 생기 있는 샛강공원이 될 수 있었다”고 감동을 전하기도 했다. 한편, 전시장에서는 선유도공원 모형과 함께 조성 당시 찍은 전경들을 볼 수 있다. 기존의 산업 구조물 곁을 감싼 식생들이 도심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독특한 경관을 만들어낸다.
식물, 삶의 토양
정영선은 평생에 걸친 작품 활동을 통해 식물을 가까이하고 자연과 조화롭게 사는 삶을 강조해 왔다. 다양한 식생을 수집하고 연구하며 교육하는 수목원과 식물원, 자연의 치유적 속성이 드러나는 명상과 사색의 장소들을 소개한다.
뉴욕주 허드슨강 상류에 지어진 ‘원다르마센터’(2011)는 명상과 수련을 위한 장소다. 마찬가지로 인근에 서식하는 식생들을 사용하고, 지형 특성을 분석해 자연 그대로를 보존하려고 노력했다. 작은 박스로 분절된 수련원과 한 사람이 지날 정도로만 낸 길에서 최소한으로 개입하려는 정영선의 태도가 드러난다. 넓은 대지를 거니는 명상의 산책로를 거닐며, 마음을 위로하고 몸을 수양하게 하는 자연의 힘이 느껴지는 곳이다.
이렇게 일곱 개의 챕터로 이루어진 실내 전시장을 나와 전시마당으로 통하는 문을 열면 생생한 풀내음이 느껴진다.
화이트큐브에 둘러싸인 선큰인 전시마당은 정영선의 손길을 통해, 오감으로 체험하는 한국식 정원으로 재탄생했다. 인왕산의 거칠고 힘찬 생명력을 재현하고 계절감을 더하는 한국 고유의 자생식물을 식재하여, 관람객들을 위한 풍성한 경관의 휴식처를 제공한 것이다.
미술관의 뒷마당인 종친부마당 또한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마당은 마당답게 시원하고 넉넉하게 확보하고 인왕산을 조망하는 시야를 열면서 전면부를 낮은 기단으로 정리하여, 각 공간의 고유함은 잘 드러나면서도 서로 어울리는 정원이 조성될 수 있었다. 두 정원은 모두 한반도에만 있는 자생종들로 꾸려졌다. 아직은 덜 자라난 풀들이 한 달 두 달 시간이 지나면서 어떻게 공간을 채워갈지 기대하게 되는 것도, 이번 전시의 매력이라 할 수 있겠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이번 전시와 연계하여 네 가지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조경 작품을 더욱 풍부하게 감상하도록 돕는 참여형 워크숍과 감상 자료, 고요한 정원과 어울려 마음속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하는 웰니스 프로그램이 준비된다. 미술관 정원 식생을 관찰하고 디지털 매체로 자신의 정원을 표현해 보는 ‘정원의 시간들’, 정영선의 조경작품을 구성하는 재료를 기억하며 공간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그곳의 시간’은 전시장 옆 6전시실에서 참여할 수 있다. 감상자료 ‘숨 쉬는 이름들’은 미술관 속 자연 요소를 오감으로 경험하게끔 현장 배포된다. 웰니스 프로그램 ‘마음의 시간, 자연의 시간’은 명상, 명상 오디오, 요가를 체험하며 미술관 자연과 정원을 느껴볼 기회로 선착순 사전 예약 후 참여하면 된다.
MMCA 영상관에서는 정영선의 조경 작업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상영이 준비된다. 그의 대표작 ‘선유도공원’(2002)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기록을 담은 ‘선유도의 사계’와 오는 4월 17일 개봉 예정인 영화감독 정다운의 다큐멘터리 ‘땅에 쓰는 시’를 관람할 수 있다.
‘정영선이 만든 땅을 읽다’를 주제로 한 학술행사도 7월 3일 오후 5시에 열린다. 세 파트로 나뉘어 진행되며, ‘조경가 정영선을 읽다’, ‘정영선의 작업을 읽다’란 주제로 관련 전문가들이 조경 담론을 나눈다. 정영선이 직접 참여하는 ‘정영선과의 대화’를 끝으로 마무리된다.
김성희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이번 전시는 한국을 대표하는 조경가 정영선이 평생 일군 작품세계 중 엄선한 60여 개의 작업과 서울관에 특화된 2개의 신작 정원을 선보이는 특별한 전시”라며, “그의 조경 작품에서 나타나는 ‘꾸미지 않은 듯한 꾸밈’이 있기까지의 각고의 분투와 설득, 구현 과정의 이야기를 통해 정영선의 조경 철학을 깊이 있게 만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자료제공 / 국립현대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