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건축의 철학적 사유를 향한 필수 입문서
건축을 사유하다: 건축이론 입문
우리는 어떻게 건축을 사유하고 이해할 수 있을까?
현대건축의 진보적 담론을 추적하다 보면 1990년대가 무척 도드라져 보인다. 이 시기에 각종의 건축 이론서들이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그간의 이론을 포집하고 선별한 다수의 ‘선집 選集, anthology’이 출판됐기 때문이다.
<Architecture Culture 1943-1968>(1993), <Theorizing a New Agenda for Architecture>(1996), <Rethinking Architecture>(1997), <Architecture Theory since 1968>(1998) 등이 그 예다. 허나 문제는 이 선집들도 여러 권이고 제각각 두꺼운 볼륨인 까닭에, 건축이론의 입문자들이 그 속에서도 길을 잃기 십상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여기 포함된 다수의 논고를 갈무리하기 위해, 결국은 이들이 펼쳐 보이는 현대건축의 이론이라는 망망한 바닷길을 항해하기 위해, 일종의 매뉴얼이나 나침반이 필요하지 않을까?
조나단 헤일Jonathan A. Hale 의 <Building Ideas: An Introduction to Architectural Theory>가 그러한 역할을 하는데, 바로 그 번역서가 근간 <건축을 사유하다: 건축이론 입문>이다.
2000년 출간된 원저는 당대의 건축이론에 대한 관심을 포괄하며 전술한 선집들과 거기 출판된 논고들을 하나의 내러티브로 묶어내고 있다. ‘이론적 실무theoretical practice’라 명명된 서론에 이어 본문은 다섯 개의 장으로 구성된다.
첫 두 장이 속하는 제1부는 ‘건축의 의미’가 어디에 근거하는지에 관해 질문을 던지며, 각각 ‘공학’과 ‘순수 예술’의 관점에서 본 건축을 묘사한다. 물론 두 가지 모두 극단적 관점으로서 건축이 그 둘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함은 자명하다. 저자의 논지는 건축에 있어서 구조적 안정성과 공간의 실용성을 넘어서는 창조적 개인의 예술적 표현을 부각시키는데, 여기서 의미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지가 제2부의 주제로서, 3장은 ‘현상학’, 4장은 ‘구조주의와 기호학’, 5장은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을 따른다. 상호주관성에 근거해 몸의 경험을 강조하는 현상학은 건축이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지에 대한 핵심적인 내용을 말해준다. 하지만 개별 주체의 경험이 상호 공유될 수 있는가에는 의문이 제기되곤 한다. 반면 언어학에서 발전된 구조주의는 훨씬 객관적인 해석 모델이라 하겠다. 그렇지만 이미 존재하는 코드의 네트워크에 개인이 놓인다는 견해는 개별 주체의 자유를 제한할 가능성을 내포한다. 이런 난제를 탈피하려는 입장이 탈구조주의 혹은 후기구조주의의 움직임을 낳았다. 한편, 관점을 크게 확대해, 사회 속의 보이지 않는 힘과 이데올로기를 간파하고 그 모순을 해결해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입장이 마르크스주의다.
건축은 과연 사회 구조와 어떻게 관계할 수 있을까? 설령 건축으로 당장에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는 없을지라도, 건축의 비판적 담론과 풀뿌리 실천이 사회 변화에 일정 부분 기여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의 시사점이다. 이러한 ‘비판성’은 1990년대 건축이론의 융성과 함께 흥했던 주제로, 5장뿐 아니라 이 책 전체를 아우르는 관점이다. 서론의 ‘이론적 실무’와 위의 세 가지 해석 모델들을 모두 통합해 제안한 결론의 ‘비판적 해석학critical hermeneutics’은 그 같은 비판성을 견지하고 있다.
전체 구성 및 내용에 더해, 원저 제목 ‘빌딩 아이디어즈Building Ideas’가 담는 중의적 의미를 염두에 두자. 저자가 굳이 이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건축과 철학을 적극 교합시키고 있는 이 책은 ‘건축에 관한 철학(이데아, 사유, 이론)’을 말하는 동시에 ‘철학(이데아, 사유, 이론)의 건축’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건축을 철학하기 / 철학을 건축하기’, ‘구축을 사유하기 / 사유를 구축하기’, ‘짓기를 생각하기 / 생각을 짓기’라는 개념이 중첩되어 제목에 담겨있는 셈이다.
우리말 제목이 이를 적극 표현하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그러한 함의는 본문의 기저에서 발견된다. 제목 이외에도 원저와 번역본에는 몇 가지 차이가 있다. 번역본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원저에 없었던 건축가나 철학자들의 생존연대를 삽입했고, 각종의 저서명을 가급적 원어(프랑스어든 독일어든 여타의 언어든)와 병기했다. 또한, 원저에 추가 설명이 필요하다고 판단될 경우 제한된 범위에서 [역주]도 삽입했다. 원저 출판 당시 아직 공사 중이던 건축물의 완공연대를 넣은 것도 여기 속하며, 드물지만 원저의 오류에 대한 교정 내용도 [역주]에 포함됐다. 고로 이 모든 사항을 고려할 때 우리말 번역본은, 번역이 원저의 의미를 일부 상실함으로써 가질 수밖에 없는 약점을 상쇄하고도 충분한 남음이 있다고 생각된다.
명쾌한 구성과 논리를 담는 이 책은 건축이론 입문서이자 학생들을 위한 교과서로서 아주 적합한데, 그 대상은 건축학도를 넘어 문화이론, 문학이론, 예술, 철학 등을 공부하는 학생들과 학제간 연구자들에게로 확장될 수 있을 것 같다. 각 장마다 제시된 추천 문헌은 이 책의 또 다른 덕목이다. 더불어 옮긴이인 김현섭고려대학교 건축학과 교수의 글 ‘현대건축, 이론과 실천의 얽힘에 관하여’(<건축평단>, 2016년 여름호)가 부록으로 첨부되어, 이 책이 논하는 건축이론의 현시적 맥락을 적절히 짚어준다. 드디어 우리도 현대건축의 철학적 사유를 향한 필수 입문서를 갖게 됐다! 글/김현섭 고려대학교 건축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