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
주변을 등지고 있는 외관에서 창을 찾아볼 수 없다. 하얗게 곡면으로 둘러쳐져 있는 외벽 안으로 어떤 비밀스러운 것이 감추어져 있을지 호기심을 자아낸다. 서울 경리단길 중에서도 ‘장진우거리’라 불리던 장소에 위치하는 만큼 시선을 끄는 자극제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 있다. 주변에 펼쳐져 있는 오래된 붉은 벽돌과는 전혀 다른 색감과 형태로, 기득권의 공간들을 슬며시 제압하는 모습이다.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장진우거리에는 현재 장진우 가게가 없다. 너무 유명하던 거리로 뜨겁게 불타오르다가 이제는 식어버린 동네지만 그곳을 그리는 마니아들은 여전히 있다. 그들이 조용히 찾아와 조용히 책만 보다 갔으면 하는 심정으로 들어선 일종의 서점이다. 그래픽 노블graphic novel을 전문으로 다루는 공간으로, 책이 가지런히 쌓여 있는 듯한 모습은 그러해서다. 특히 창이 없는 하얀 세라믹 소재의 외관은 도예작가 문평과 협업한 것으로 낡은 사전의 단면을 구현한 결과물이다. 창 없는 외관은 빼어난 자연환경이나 시원스런 조망을 기대하기 어려운 주변 환경을 의식해서다. 창 밖 풍경이라고는 옆 빌라의 벽돌 벽뿐이기에 오롯이 책에만 집중하도록 창이 사라진 것이다. 창이 없기에 조도가 공간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창 대신 단계별로 조도가 조절되는데, 특히 천창과 벽 틈에서 스며드는 빛은 날마다 다르기에 모든 조명이 분리되고 책을 읽는 곳에는 별도의 조명 계획이 이루어져 있다.
문학적 구성과 특성을 지닌 작가주의 만화를 일컫는 그래픽 노블이 5천 권 정도 자리한다. 동시에 가볍게 술을 마실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술 마시는 만화방’이다. 이야기 구조가 탄탄하며 짜임새 있고 그림을 통해 풍부한 상상력을 전달하기 때문에 그래픽 노블의 마니아가 꽤 많다. 그들이 마음껏 그 문화를 즐기도록 서점이지만 서점처럼 딱딱하지 않으려 노력한 점이 느껴진다. 도시의 맥락을 따르는 데 치중하기보다는 오로지 책에 집중하도록 책 보는 자세에 중점을 둔 내부 공간이 그런 분위기를 연출한다. 누워서 보거나 정자세로 앉아 보는 등 선호하는 독서 자세가 모두 다른 만큼 그에 따라 가구가 다채로운 높이로 공간에 녹아 있다. 더불어, 이런 가구들로 인해 너무 자유분방하여 흐트러지기 쉬운 술집이 되는 것도 경계하는 분위기다. 서점도 술집도 아닌 제3의 유희공간이자 문화공간을 제안한 것이다.
외장재인 세라믹은 시간이 흐를수록 때가 타고, 때가 탈수록 색감이 보다 아름다워진다. 시간에 따라 흉해지는 게 아니라 시간의 적층으로 점점 부드러워지고 성숙해가는 이미지를 발한다. 세라믹이라는 재료의 농익어가는 변화로 시간의 적층이 기록되는 것이다.
작품명: 그래픽 / 위치: 서울 용산구 회나무로39길 33 / 설계: 오온건축사사무소 / 인테리어: 유랩 / 시공: 원 디자인 / 용도: 서점 / 면적: 366.45m² / 규모: 지하 1층, 지상 3층 / 외부마감: 세라믹 / 내부마감: 콘크리트 폴리싱 (바닥), 페인트 (벽), 컬러페인트 (천장) / 사진: 강민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