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에서 늘 배경으로 존재하는 근대 건축. 암울한 현실 속에서 절규를 외치면서도 서구 근대 문명에 들떴던 사람들. 이들에게 근대건축은 이상과 현실, 이성과 감성이 맞닥뜨리던 장소였다. 서울 시내를 걷다 보면 고층 건물 사이로 근대 건축의 모습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일제의 잔재로, 역사의 아픔이 서려 있는 건물들이지만, 그 또한 보존하고 기억해야 할 중요한 문화재로서 그 가치를 높이 인정해야만 한다.
이 책은 재평가하고 기억해야 할 근대 건물의 이야기를 다룬다. 자세하게는 그 건물들을 설계하거나 시공했던 건축가들의 삶을 그린다. 일제가 세운 학교에서 건축을 배우고 건축가로 성장했던 조선인 건축가들과 비주류 외국인 건축가들의 삶을 조명한다. 당시 그들은 수많은 차별과 편견 속에서도 실력을 쌓아나가며 민족자본가들의 도움을 받아 백화점, 공장, 학교, 주택, 병원 등 자신만의 색깔로 건물을 설계했다. 책에서는 일제가 조선을 수탈하기 위해 만들었던 건축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과 개인적 이상 사이의 고민과 간극을 어떻게 줄여나가는 지를 담는다.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나온 조선인 건축가들은 대부분 총독부나 경성부청과 같은 관청에 취직해 일제 지배와 수탈을 위한 건물을 지었다. 친일 논란의 중심에 설 법도 했지만, 건축가들은 기술자라는 인식이 강해 별다른 주목을 받지 않았다. 그중에는 식민지라는 현실과 마주해 항일운동에 뛰어든 이도 있었고, 조국의 이름으로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오히려 건축에 매진하는 이들도 있었다. 저마다의 사정으로 건축도 저마다의 개성을 살려 다양하게 만들어냈다.
책은 총 15장으로 나뉘며, 당대 건축가들의 탄생 배경을 소개하며 시작된다, 조선인 최초로 총독부 건축기사가 되고, 종로구에 건축사무소를 연 박길룡, 보리스건축사무소 경성출장소 일원으로 선교 관련 건축을 주로 맡았던 강윤, 최고의 구조계산 전문가로서 미쓰코시백화점을 비롯해 경성 대부분의 백화점 구조계산을 한 김세연 등 12인의 건축가들의 삶과 건축 이야기가 차례로 진행된다. 이 책은 대한민국의 진정한 건축 1세대들의 자취를 좇는 책을 통해 한 시대를 풍미했거나 그러지 못한 채 저물었던 이들이 남긴 건축물을 되돌아본다. 책을 통해 우리나라 건축 1세대들의 삶과 그들이 남긴 유산을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