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제연 기자
기사입력 2023-10-31
현상설계, 건축계에서 흔히 ‘콤페’라고 칭하는 설계자 선정 방식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서구의 경우, 고대 그리스부터 콤페가 시행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기원전 448년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에 세워진 전쟁 기념관 설계 공모가 대표적인 예다. 이후 긴 역사 속에서, 수많은 건축가가 설계 공모에 당선됨으로써 이름을 알렸다. 1419년 피렌체 대성당의 돔 공모에서 당선된 브루넬레스키도, 1989년 36세의 나이로 프랑스 국립도서관 설계공모에 당선되어 세계의 주목을 받은 도미니크 페로도 모두 콤페의 수혜자다. 이처럼 현대에 이르기까지 콤페는 젊은 건축가들의 등용문이 되어 왔다.
반면 동아시아에서 콤페가 열린 것은 그렇게 오래된 일이 아니다. 사실상 중국과 일본, 한국은 1800년대 후반까지 ‘건축’이라는 단어가 없었고, 건축가의 직능도 확립되어 있지 않았다. 서양에 문호를 개방한 이후, ‘Architecture’라는 개념이 유입되면서 ‘건축’이라는 번역어가 만들어졌고, 그 단어가 내포하는 의미에 대한 논의가 오가기 시작했다. 콤페는 당연히 생소한 방식이었다. ‘경합’ 개념이 없지는 않았지만, 현대의 것과 비슷한 건축 콤페의 시작은 비교적 개항이 빨랐던 일본에서 1907년 열린 타이완총독부 청사 설계공모부터라 할 수 있다.
요시다 켄스케의 <건축 콤페: 일본 건축 콤페의 볼썽사나운 역사>는 이 ‘타이완총독부 청사 공모(1907)’부터 ‘2021 도쿄 올림픽 스타디움 국립신경기장 콤페(2012)’까지 일본 근현대 건축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요 콤페의 이모저모를 이야기한다.
책의 부제처럼, 일본 건축 콤페 역사는 볼썽사납고 황당한 일로 가득하다. ‘일본 최초의 콤페다운 콤페’였다는 타이완총독부 청사 공모조차 그렇다. 당시 총 27팀이 참여했고 2차에 걸쳐 심사했으나 1등을 선정하지 못했으며, 10년 뒤 2등 안을 바탕으로 타이완총독부 기사가 작업하여 완공된 건물은, 원안과는 달리 ‘장식이 과한 메이지 붉은 벽돌 양식’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외에도 ‘당선작 없음’이라던 콤페의 심사위원이자 기획설계자였던 건축가의 설계로 지어진 ‘히로시마 평화기념 카톨릭 성당’, 공모 지침을 어겼음에도 당선된 ‘센다이시 공회당’, 1등 안을 발표하고 나서 예산 초과, 땅의 역사적 맥락 저해 등을 지적하는 여론에 밀려 새로 콤페를 진행한 ‘신국립경기장’ 등의 사례들을, 저자는 분통을 터뜨리며 소개한다.
이러한 사건들을 근거로, 저자는 이처럼 공정해야 하는 콤페가 불공정하게 진행되고 그게 지금에 와서도 고쳐지지 않으니 콤페 따위 없애버리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책을 번역한 강영조 교수는 옮긴이의 말에 “건축 콤페가 어제오늘 시작한 것이 아니라는 것과 그래서 쉽사리 없어질 제도가 아니라는 것을 저자도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적었다. 그리고 “이 책은 콤페 무용론이 아니라 근현대 일본 건축가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역사에 남을 명건축을 만들게 되었나를 보여주고 있다”면서 “일본의 건축가들이 좋은 건축을 만들기 위하여 흘린 뜨거운 땀방울의 기록”이라고 말한다.
일본 건축계의 기초를 쌓아 올린 영국 건축가 조사이어 콘더Josiah Conder의 말을 빌리자면, “콤페의 가장 큰 목적은 ‘페어플레이’다.” 이 ‘공정성’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는 항상 잡음이 뒤따른다. 그럼에도 공정함은 대중을 위한 건축에 있어 언제나 중요한 본질이며, 그 가치는 수호되어야 마땅하다. <건축 콤페: 일본 건축 콤페의 볼썽사나운 역사>는 일본 건축 콤페의 ‘흑역사’를 통해 그 사실을 반증하고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