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22-10-07
땅은 잘못 없다
신민재 건축가의 얇은 집 탐사
모든 건축은 땅으로부터 시작된다. 때론 그 땅이 답을 주기도 하지만, 제약이 되는 경우가 더 많다. 반듯하고 평평한 모난 구석 없는 땅, 흰 도화지같이 무엇이든 그릴 수 있는 땅은 그리 흔치 않기 때문이다. 물론 땅이 제약이 된다 하여 설계하기를 포기하는 건축가는 없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둘러보면 오히려 제약을 기회로 활용한 영리한 사례들이 도처에 있다.
건축가 신민재 역시 언젠가부터 그러한 건물들에 시선을 뺏겼다. 특이한 땅에 들어선 건축물들을 찾아 조사하고 그런 모양의 집이 될 수밖에 없는 연유를 추리하여 페이스북에 남기기 시작했다. <땅은 잘못 없다>는 지난 3년간 모은 사례들 가운데 선정한 60개 집의 이야기를 엮은 책이다.
“이런 땅에도 건물을 지을 수 있을까요?” 저자의 ‘얇은 집’ 탐사는 한 통의 전화에서 시작됐다. 땅의 폭이 너무 좁다는 이유로 여러 건축가에게 퇴짜를 맞은 땅이었다. 2.5m가 채 안 되는 폭에 20m 깊이의 땅, 주차장 한 칸을 세로로 길게 이어 붙인 모양새였다. 저자는 이 필지를 보고 걱정이 앞서면서도, 어떤 집을 지을 수 있을지 그려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런 땅에 지어진 건축물이 또 있을까?’, ‘이 땅은 어쩌다가 이런 모습이 되었을까?’ 하는 호기심이 떠올랐다. 못난 땅에 대한 이야기는 거기서 출발했다.
책은 60여 개의 ‘얇은 집’을 ‘옛길의 흔적’, ‘도로가 남긴 상처’, ‘택지개발의 흔적이 남아있는 자투리땅’, ‘물길의 흔적’, ‘큰 시설의 경계에 남은 땅’이라는 5개의 주제로 나눠 소개한다.
도시 조직이 확장하면서 좁은 길이 대로로 넓어졌으며, 없던 도로가 들어서 집들이 헐리기 시작한다. 급속한 경제성장에 힘입어 동네를 이루던 작은 땅들이 합쳐져 개발되었고, 시냇물과 하천이 흐르던 물길은 복개되어 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땅은 이러한 과정들을 겪으면서, 잘려 나가 반쪽이 되거나 개발되지 못하고 홀로 덩그러니 남겨지기도 했다. 저자는 도시의 변화에 휩쓸려 산전수전을 겪으며 지금까지 굳건히 자리를 지켜 온 땅의 내력을 특유의 호기심과 관찰력으로 분석한다.
글을 보충해 주는 자료도 풍성하다. 기록 사진, 지적도, 항공 사진, 답사 사진, 스케치와 같은 다양한 자료 덕에 저자와 함께 공부하고 탐사하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이 책에 담긴 땅의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그 땅이 간직한 ‘도시의 기록’까지 살펴보는 유의미한 시간이 될 것이다.
출간을 맞아 신민재 건축가가 “뜨아(뜨거운 아키텍처)”를 제보할 페이지를 만들었다. 아래 이미지를 클릭하거나 QR코드를 인식하면 우리동네 ‘얇은 집’을 건축가에게 알릴 수 있다. 도시와 건축을 사랑하는 이들의 많은 참여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