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포트리스
에디터 전효진 차장 글 김소원 디자인 한정민
자료제공 더코너즈 건축사사무소
1987년 반포동 주홍길에 건축한 흰타일벽집은 상가 주택으로, 동네에서는 마트, 우유대리점이 들어선 건물로 인식되었고 한 가정에게는 3대에 걸친 삶의 시간이 담긴 건물이었다. 3층짜리 하얗고 단정한 건물은 시간이 흐름면서 어느새 그 쓰임새를 다했다. 사소한 수리만으로 정주 여건을 유지할 수 있는 임계점을 지나 노후건물에서의 삶도 더는 어려웠다. 변화가 필요했다. 주흥길에는 아직 20여 년 전 동네 풍경이 남아 있다. 물론 언젠가는 자본의 흐름을 타고 새롭게 개발되겠지만,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분위기다. 이러한 환경에서 ‘레드 포트리스’는 주흥길의 새로운 얼굴이 되는 작업이었다. 마치 무채색 도시에 첫 붓질을 하는 과정과도 같았다.
건축주의 확고한 의지 중 하나는 ‘붉은벽돌집’을 짓겠다는 것. 붉은색 벽돌은 오랜 시간을 견디는 묵직하고 단단한 재료다. 건축주가 거주하던 집이 흰타일벽집인 것을 생각하면, 타일의 유지관리 어려움을 수십 년간 체득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성토일 터. 하지만 붉은벽돌집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 미묘한 색조 차이, 크기, 쌓기 방식, 메지시공방식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하게 탄생할 수 있다.
정북일조 사선은 소규모 건축물의 최대 조형요소로 작동한지 오래다. 곧게 올라선 건물이 9미터 지점부터 정북일조방향의 사선이 건축 형태를 완성하는 구태의연한 관습을 거슬러, 비껴 나가는 것이 이번 프로젝트의 과제였다. 이에 주흥길에 면한 입면은 단정하게 반응하고, 북측 사선으로 후퇴되는 부분에 테라스를 만들었다. 법적조건으로 조형된 건물이 아니라, 벽돌의 육중한 물성이 적층된 덩어리가 드러나기를 바랐다. 게다가 일조사선을 피하기 위해 절반 면적을 개방한 벽체는 둔탁해 보일 수 있는 매스에 가벼운 균형추로 작동했다.
정북일조로 3층부터 층층이 물러선 건물의 최대 한계선까지 사용 가능한 면적을 확보하고, 일률적인 공간이 반복되는 임대전용건물의 한계를 벗어나 모든 공간에 한 가지 이상의 특장점을 갖도록 계획했다. 전용 공간에는 되도록 외기와 면한 중정, 테라스, 정원이 접하고, 채광과 조망을 조절해 정주환경의 쾌적성을 높였다. 근린생활시설로 계획된 지하1층과 지상1층에는 선큰 중정과 작은 정원을 조성하고, 다세대주택이 들어선 지상 2, 3층은 사생활 보호뿐만 아니라 주요 파사드로서 역할을 고려해 창호, 영롱쌓기, 금속 부재를 조화롭게 혼합했다. 건축주 세대가 입주할 4, 5층은 넓은 테라스, 다락과 연계한 복층 공간을 계획해 일조 사선으로 협소할 수 있는 공간의 단점을 극복하였다.
적층된 각 공간은 그 용도와 공간적 가능성, 한계를 토대로 사용자가 새롭게 써내려 갈 최소한의 공간 시나리오를 제안한다. 마치 비탈길에 세운 붉은 요새처럼 견고하고 단단하게 직조된 모양새 사이로 여지를 비워 두고, 수고스럽게 이리저리 방향을 틀어가며 조심스레 자리를 지킨다. 좁은 산길을 돌고 돌아 결국 만나게 되는 산 정상의 풍광을 발견하듯, 좁은 골목길에 숨어 있는 건물을 마주하는 이 쾌감이란. 붉은 바탕을 펼쳐 놓은 채 다양한 빛깔과 다양한 형상을 뽐내는 주홍길 빨간벽돌집 ‘레드 포트리스’는 새로운 활기를 뿜어낼 준비를 마쳤다.
작품명: 레드 포트리스 / 위치: 서울특별시 서초구 주흥길 80 / 설계: 더코너즈 건축사사무소 / 설계담당: 홍종화, 최경철, 이용재 / 시공: 주.삼후종합건설 / 구조설계: 해운구조기술사사무소 / 전기설계: 주.극동전기기술단 / 기계설계: 주.성신기계설비 / 건축주: 김헌수, 김희수 / 용도: 다세대주택, 근린생활시설 / 대지면적: 233.2m² / 건축면적: 116.2m² / 연면적: 519.11m² / 건폐율: 49.83% / 용적률: 170.48% / 구조: 철근콘크리트조 / 외부마감: 적벽돌, 징크 / 내부마감: 도장, 원목마루 / 설계기간: 2021.2~2021.6 / 시공기간: 2021.11~2022.10 / 완공: 2022.10 / 사진: 신경섭, 송유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