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 바티리을
‘주거지 내에서 다양한 편익시설을 제공하는 시설로서 일상적인 주거 생활과 밀접한 시설’. 건축법에서 말하는 근린생활시설의 정의다. 하지만 과연 오늘날의 근린생활시설은 더 나은 생활환경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을까? 십중팔구는 그렇지 못하다. 더 많은 임대 수익을 내기 위해, 도시적 관점은 무시한 채 용적률 확보에만 치중한 매스를 만들어내고, 그 위를 현란한 간판으로 뒤덮는다. 그렇게 주민들의 편의를 돕기 위해 등장했던 건물들은, 종종 본래의 목적을 잃고 삶의 질을 저해하는 요소가 되곤 한다.
생활환경을 저해하지 않으면서 편의와 문화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지역 커뮤니티와 같은 공공성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흔히 볼 수 있는 근린생활시설에서는 공공성을 기대하기가 어렵다. 상업성이 드러난 이러한 건물은 문을 열고 들어가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이용해서 단절적으로 각각의 층을 이동한다. 계단은 비상시에만 사용할 수 있도록 숨겨져 있어서 가로(街路)를 거닐던 발걸음은 건물 안에 들어오는 순간 최소화된다.
제인 제이콥스는『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The Death and Life of Great American Cities』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도시를 활기차게 만드는 최고의 요인은 사람들이다. 보행자로 가득한 가로를 만들려면, 그들을 그곳으로 오게 하는 기능이 필요하다. 즉, 상점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곳에 가서 머무를 수 있는 정당한 이유를 제공한다.” 청담동 골목에 위치한 바티리을은 이러한 생각처럼 가로의 활동성을 근생 건축물 내부까지 잇고자 한다.
가로에 따라 외부를 관찰하면, 동쪽 파사드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기역(ㄱ)’을 받치고 있는 ‘니은(ㄴ)’의 모양이다. 이어서 주 출입구가 있는 북쪽 파사드에 다다르면 ‘리을(ㄹ)’의 모양과 외부로 보이는 계단을 찾을 수 있다. 동선이 뚜렷한 이 외부계단은 건물 내부로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옮기게 한다. 표지판 같은 기호가 아닌 공간적 장치로 사람들의 움직임을 유도하는 것이다. 건물 전체에 수직으로 흐르듯이 이어지는 계단은 가로에서 연속되어 건축물 자체의 활동성을 부여한다. 여기에서 도시-가로-건물은 서로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각자의 관계 위에서 유연하게 연결되어 존재하게 된다.
입주자가 융통성 있게 활용할 수 있도록 건물 내부는 층별 단절을 최소화하면서 인공 지면을 통해 이동과 결합, 그리고 독립을 함께 고려했다. 지하에서 보이는 선큰 구조는 또 하나의 접지층을 구성한다. 2층은 발코니가 확장된 테라스를 통해 접근할 수 있으며, 3층은 중이층으로 오픈된 공간을 통해서 2층과 연결된다. 4, 5층은 층고가 높은 복층형으로 구성된다. 각 층 간의 접근성을 고려한 이러한 설계에서 가로와 연결되는 계단은 공간에 운동성을 부여하며 활력을 불어넣는다.
이웃과 상호 관계 속에서 보행과 만남, 거래와 접촉으로 커뮤니티의 기초 단위를 이루는 것이 건축가가 생각하는 ‘근린(近隣)’이다. 프랑스어로 ‘bâti(지어진, 세워진)’라는 형용사와 한글 자음 ‘ㄹ(리을)’이 합쳐져, ‘세워진 리을’로 번역할 수 있는 바티리을의 이름을 다시금 생각해본다. 한글 자음 리을이 구불구불한 옛 골목의 느낌을 자아내는 것처럼 바티리을은 가로의 개념을 바탕으로 근린에 대한 고민을 나누고 있다.
작품명: 청담 바티리을 / 위치: 서울시 강남구 청담동 59-12 / 건축가: 김동진 – (주)로 디자인 도시환경건축연구소 / 설계담당: 정순준, 김태연 / 건축주: 김상교 / 용도: 제2종 근린생활시설 (지하 1층~지상 4층), 단독주택(지상 5~6층) / 대지면적: 274.62m² / 연면적: 742.88m² / 구조: 철근콘크리트조 / 주요 마감: 외벽 – 노출콘크리트 / 바닥 – 마천석(외부), 수평몰탈(실내) / 설계 및 시공기간: 2007.5.1~2008.7.10 / 사진: 로 디자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