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의제
에디터 현유미 부장 글 황혜정 디자인 김예진
자료제공 배병길 도시건축연구소
병풍처럼 펼쳐진 산자락을 의식하며 땅 위로 차분하게 펼쳐져 있다. 아니, 흩어져 있는 것도 같다. 이쪽에서는 담장 안으로 하늘과 별과 달을 고스란히 담으려는 듯 깊게 자리하고, 저쪽에서는 지나가는 바람에 넉넉하게 인심 쓰듯 훤하게 길을 내어주고 있다. 앞마당으로는 벌판이 손을 뻗어 맞닿아 있으며, 뒷마당 안으로는 나지막한 언덕과 오래된 고목이 성큼 들어와 있다. 창과 개구부를 액자 삼아 내다 보이는 나무에는 가을이 탐스럽게 열려 있다.
조선조의 유서 깊은 집안인 반남 박씨 종가 댁으로, 경기도 과천시의 백운산 자락과 백운 저수지에 인접한 전원에 자리한다. 삶의 역사가 축적된 한 집안의 계보를 봐서도, 대지가 품은 자연의 짙은 농도를 봐서도, 꽤 무거운 질량의 고민이 건축에 담겨 있음을 느끼게 된다.
한옥의 양식을 취하고 있지는 않지만, 자연을 벗 삼아 더불어 지내던 조선조 선비의 일상을 구현해 낸 한옥의 공간 체계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산자락과 벌판과 주변의 나무들에게 큰 소리 내지 않고 무채색의 단출한 선만으로 표현된 소박하고 젊잖은 표정이 그러하다. 큰 경계를 두지 않고 나지막한 담장으로 자연과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이어가는 태도도 그러하며, 마당과 중첩된 공간들 사이사이로 하늘이 담기고 바람이 오가며 빛이 채워지는 모양새도 그러하다.
안과 밖의 경계가 느슨하여 안과 밖은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집은 몸소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는 자연과 인간의 경계, 자연과 건축의 경계 역시도 구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중의성이 담겨 있다. 이는 전통 한옥이 가진 정신이기도 하다. 실제로 곳곳에서 경험되는 수직적 및 수평적 여백은 불이不二의 개념을 건축적으로 실현하는 통로가 된다. ‘채워지도록 비어 있는, 비어 있기에 채워지는’ 상호 관계가 반복되이 만들어지면서 여백을 통해 순환되는 비움과 채움 역시 불이, 즉 하나임을 읖조리고 있다. 덕분에 공간의 지경과 관계성은 건축 외적인 요소로까지 점점 확장된다.
종가의 옛 한옥을 허물고 다시 건축한 작업이다. 남아 있는 현판 형식의 상량문을 따져 볼 때, 1863년 혹은 1923년이 계해 년이 되는 집으로 80~140년 남짓 된 한옥이다. 소박하지만 지조 있는 선비 가문의 정신 세계와 장소성을 계승하는 데 중점을 뒀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시대의 종가 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들의 사유의 흔적들이 과연 이 시대에도 유효한 가치를 가질 수 있는가?,’ ‘유효하다면 이와 같은 장소를 이 시대에 어떻게 건축화할 것인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간 여정이 들여다 보인다. 결과적으로, 자연과 인간과 건축의 상호 존재 방식에 관하여 한국적 공간 개념을 현대적인 건축 언어로 고상하게 승화하고 있다. 전통에 관한 건축 정신을 이 시대에 어우러지도록 재해석하여 구현한 작업으로 평가받으며 한국건축가협회 아천 건축상과 경기도 건축문화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작품명: 학의제 鶴儀濟 / 위치: 경기도 의왕시 학의동 / 지역 지구: 개발제한구역 / 설계: 배병길 / 구조설계: 가야구조(석영호) / 전기, 기계설계: 건창 기술단(권영수), 나라설비(이종주) / 건축주: 박찬유 / 용도: 단독주택 / 대지면적: 3,831.0m² / 건축면적: 274.89m² / 연면적: 329.64m² / 건폐율: 7.18% / 용적률: 8.60% / 규모: 지상2층 / 구조: 철근 콘크리트조 / 외부마감: 노출콘크리트, 알루미늄쉬트, T24, 투명복층유리 / 내부마감: 석고보드위 비닐페인트(벽,천정) 온돌마루(바닥) / 사진: 건축가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