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헌과 사야원
이로재 건축사사무소 | Iroje architects & planners
검은 코르텐 담장을 배경으로 팥배나무가 빽빽하다. 나무들 사이 작고 거친 돌들이 자연 그대로의 형상으로 흩어져 자리하고, 이끼와 풀과 들꽃들이 자유하게 상생하고 있다. 그들 사이로 길고 곧게 뻗어 있는 화강석 길을 따라 천천히 거닐어 보면, 이곳이 집 앞에 딸린 작은 안마당인지 거대한 숲 속인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다.
봄이면 같은 듯 다른 빛깔의 연초록들이 앞 다투어 물오르고, 여름이면 농익은 잎들이 그늘을 드리운다. 팥배나무가 현란한 붉은 색채로 정원을 가득 채우며 가을을 알리고, 순백색의 설경 속에 대나무가 고고한 자태를 드러내며 겨울을 채운다. 정원의 사계 가운데에 건축은 사라지고 없다. 깊고 풍성한 풍경만이 남아 있다. 집의 이름 그대로다. ‘모헌(某軒)’, ‘아무개의 집’이라는 뜻이다. 이름이 없다는 것이니 존재하지 않는 집이라는 의미를 담은 것이다.
건축주가 40년 전부터 살아온 집의 부속 채로 지어진 곳이다. 긴 세월을 거치면서 경북대학교 정문이던 자리가 후문으로 여건이 바뀌었고, 집 주변의 경제적 풍광도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세월 따라 주거공간을 옮기기보다 건축주는 오랜 시간 한자리를 지켜온 보금자리에 자신이 사랑하는 조경공간을 통해 쇠락해가는 지역을 회복시켜 보고 싶었다.
기존 주택에 접한 땅을 추가로 매입해 마련한 게스트하우스는 손님용 침실 하나와 지인들과 함께 식사할 수 있는 사랑채로 구성되어 있다. 무엇보다 한국식 나무들로 우거진 정원을 함께 즐기고 감상하는 장소이길 원했다. 건축공간이 한 발 물러서 있는 태도 혹은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는 공간 개념에 집중되어 있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집은 주인 된 숲을 더욱 깊고 풍성하게 연출하고 한정 짓기 위한 틀로서 존재한다.
그렇게 1백 평 남짓한 땅에 네 개의 마당이 들어서 있다. 집이 뒤로 조금 물러나 앞마당이 최대한 넓게 마련되어 있고, 식당과 침실이라는 두 개의 겹이 설정되어 그 가운데에도 마당이 자리한다. 공간의 두 겹을 연결하는 통로를 중심으로 한 쪽은 물의 정원, 다른 한 쪽은 지하까지 빛을 끌어들이는 선큰가든으로 다시 두 개의 마당으로 나뉘어 있다. 침실 창밖으로 바라보이는 대나무가 심겨진 작은 마당까지, 넷이다.
시각적으로 활짝 열려 있는 식당 안으로 안마당의 정경이 성큼 들어온다. 풍경은 식당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연꽃향이 그윽한 연못을 지나 한식 미닫이문을 열고 침실 안까지 스르르 흘러들어간다. 네 개의 마당과 두 겹의 공간이 서로 중첩되어 순환되어 흐르는 풍경으로 인해 공간은 한층 풍요롭고 깊어진다. 이 모든 것은, 건축이 스스로 사라지며 기꺼이 자리를 내어준 덕분이다.
모헌과 좁은 길을 마주하고 있는 건너편 땅에는 또 하나의 정원이 자리한다. 일본 조경가가 설계한 ‘사야원(史野園)’이다. 이곳에 들어가려면 ‘불로문’이라 이름 붙인 묵직한 돌문을 거쳐야 한다. 그런데 문 높이가 낮은 탓에 문을 지나려면 고개를 숙여야만 한다. 사야원의 고매한 가치에 자연스레 머리를 숙이고 겸손한 마음으로 맞이하는 셈이다.
그렇게 들어선 사야원은 땅의 면적은 모헌보다 배는 넓지만, 일본 조경 특유의 단아함을 품은 덕분인지 무척 정갈한 모습이다. 한국식 조경의 풍취가 물씬 풍기는 모헌 마당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른듯도 하다. 그러나 소사나무, 화살나무, 진달래, 연산홍 등 정원의 수목들을 둘러보고 있자면 자연스레 한국의 산수가 떠오른다. 모헌과는 또다른 매력이다.
정원 깊숙한 곳에는 다실 하나가 자리한다. 3백여 평의 정원 중에 겨우 다섯 평을 차지할 뿐인데, 그 존재감마저도 지우려 애쓴다. 다실을 둘러싼 세 개의 벽을 여닫을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세 벽을 모두 활짝 열면 순식간에 공간은 사라지고 만다. 부재에서 존재의 가치를 찾은 모헌과 맥을 같이하는 부분이다. 존재감 없이 존재하는 ‘어리석은 집’이라 하여 다실은 ‘우정(愚亭)’이라 불린다. 그렇다고 다실이 우거진 정원에 마냥 묻혀 있기만 한건 아니다. 현대적인 감각으로, 거칠게 방치된 듯한 야생의 질서에, 세련된 긴장감을 부여한다. 규모는 작고 형태는 단순하지만, 응축된 단단함으로 흐트러지듯 열어젖힌 대지의 중심을 잡아주는 것이다.
프로젝트: 모헌 / 위치: 대구광역시 북구 상격동 / 설계: 승효상 / 부지면적: 357.16m² / 건축면적: 120.90m² / 연면적: 164.68m² / 높이: 7.45m / 빌딩 규모: 지하 1 층, 지상 1 층 / 구조: 철근 콘크리트 / 용도: 주택 / 소재, 외장: THK24 쌍 유리, THK2.3 코르텐, 목재 / 재질, 내부: 노출 매스 콘크리트, 목재 바닥 / 공사 기간: 2009.11 ~ 2011.11 / 사진: 김종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