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글 김제연 기자
하버드 대학교 디자인대학원GSD 학장 새라 와이팅Sarah Whiting의 특별강연이 10월 25일 서울시청에서 열렸다. 서울시 주최로 열린 이번 강연은 ‘중간을 바로 세우기: 단독건물과 메가 스케일 중간 영역의 도시주의’를 주제로 진행됐는데, 그녀가 오랫동안 연구해 온 이론과 사례들을 바탕으로 현재의 도시를 돌아보고 더 나은 도시를 만들기 위한 여러 방안을 제시한 자리였다. 세계적 도시 전문가의 폭넓은 시각을 공유하는 자리였던 만큼 시청 임직원, 건축계 종사자, 시민 등 다양한 청중이 강연장을 채웠으며, 하버드 디자인대학원 조경학과 교수이자 오피스박김 김정윤, 박윤진 대표도 함께해 강연자와 청중 사이의 소통을 도왔다.
새라 와이팅은 건축에 정치, 경제, 사회 등을 접목한 거시적인 시각으로, 건축 환경과 인간의 삶, 공공성의 관계를 탐구해 온, 이론가 겸 건축가이다. 예일 대학교와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건축 학사와 석사를, MIT에서 건축사 및 이론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이후 프린스턴 대학교, 일리노이 공과대학, 켄터키 대학교, 플로리다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교육자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2010년부터 2019년까지는 미국 라이스 대학교 건축대학 학장을 역임했는데, 그 기간 동안 학교의 교육 커리큘럼을 바꾸고 새로운 방식의 스튜디오와 시설을 설립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혁신을 꾀한 바 있다. 이러한 역량을 인정받아 2019년 하버드 GSD 역사상 최초의 여성 학장으로 임명됐으며 현재까지도 GSD를 이끌고 있다. 또한, OMA와 피터 아이젠만 사무소에서 쌓은 실무 경험을 바탕으로, 2000년에는 배우자인 론 위트Ron Witte와 함께 WW Architecture를 설립하여 실무를 통한 건축적 해법도 꾸준히 모색 중이다.
도시 공간과 건축을 통해 인간 삶의 질을 높일 수 있을까? 건축가들에게 주어진 오래된 질문이다. 와이팅은 많은 건축가들이 그 고민 끝에 선택한 답이 바로 ‘상징적이고 시끄러운 건축물’이라고 말하며, 강연의 서두를 열었다. 빌바오가 증명하듯 랜드마크적 건축물은 도시 전체의 경쟁력을 높이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도시의 모든 건물이 랜드마크가 되려 한다면 어떨까? 제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시끄러운 건축물들로 가득 찬 도시가 과연 매력적일 수 있을까?
와이팅은 이에 대한 대안으로 ‘중간 스케일의 도시 공간과 건축’, 그리고 그 ‘공간 간의 연결’을 제시한다.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미스 반 데 로에의 ‘일리노이 공과대학 캠퍼스 계획안'(1939~1959)에서도 등장한 개념이다. 미스는 이 프로젝트에서 매우 넓은 범위를 한 번에 계획했는데, 특히 외부 공간과 건물의 관계성에 집중해 그리드 시스템 속에서 다양한 크기의 건물을 치밀하게 배치하고, 이를 연결하고 확장하며 자신의 건축의 핵심인 ‘흐르는 공간’을 구축했다고 평가 받는다.
그렇다면 과거의 이 사례가 현대 도시에는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도시의 각 부분과 공간, 사람을 연결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와이팅은 다시 한번 세 개의 건축 전략을 답으로 내어 놓는다.
첫 번째는 ‘공공 환경Public Environmentalisms’으로, 녹지나 수변공간 같은 자연적 요소로, 도시 공간들을 연결한다는 전략이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보스턴의 여러 공원을 수로를 통해 연결한 ‘에메랄드 넥레이스Emerald Necklace’와, 휴스턴 물길을 따라 형성한 선형 공원인 ‘바이유 그린웨이Bayou Greenways’, 국내 작품 중에는 오피스박김의 ‘양화 한강공원’을 꼽았다. 이들은 모두 기존의 도시 수변공간을 시민들이 여가와 휴식을 누릴 수 있도록 개선한 작업인데, 그러한 개선의 결과물은 반드시 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을 필요는 없으며, 케임브리지의 ‘켄달 스퀘어Kendall Square’처럼 여러 개의 작은 열린 공간을 통해 새로운 관계를 창출할 수도 있다며 다양한 접근법을 제시하기도 했다.
두 번째 전략은 ‘촉매를 위한 단면Catalytic Sections’으로, 관계를 만들어 내는 촉매 공간에 집중한다는 개념이다. ‘보스턴 시청 리노베이션’과 ‘BBC 사옥’처럼, 내·외부의 경계 또는 공용공간과 사무공간의 경계를 흐리는 작업에서 이 전략이 명확하게 드러나며, 특히 ‘보스턴 ICA 건물’과 같이 캔틸레버 등의 건축적 요소를 통해 수변공간과 연계된 섹션을 창조하는 장면에서는 더 직접적으로 자연과 도시 공간을 잇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마지막 전략인 ‘활성화된 인프라스트럭쳐Activated Infrastructures’는, 문자 그대로 고속도로와 지하철 등 인프라와 관련된 공간을 활성화하는 방안이다. 보스턴의 고가도로를 지하화하고 공원을 설치한 ‘로즈 케네디 그린웨이Rose Kennedy Greenway’, 파리 지하철을 연장하고 주변부를 활성화하는 ‘그랑 파리 익스프레스Grand Paris Express’ 등이 대표적인 예다. 그중에서도 대규모 프로젝트인 ‘그랑 파리 익스프레스’는 총 200km의 선로와 68개의 역이 새롭게 추가될 예정이며, 각 구역 설계에 지역의 예술가들과 건축가들이 참여하는 만큼 단순한 기반 시설을 넘어 지역 사회 활성화의 마중물이 된다는 의미까지도 더하고 있다.
이러한 이론과 전략의 구체화는 그녀의 작업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번 강연에서는 미국과 모로코, 중국과 대만을 대상지로 한 박물관과 미술관, 경기장 등 WW Architecture의 계획안 6제가 소개됐다.
건축물 내에 다양한 크기의 공간을 구축한 것은 ‘중국 창사 프로젝트’가 잘 보여준다. 기존의 아름다운 농촌 풍경을 유지하면서, 건축을 통해 지역 활성화에 이바지하고자 한 취지에서 시작된 프로젝트로, 건축주는 그저 고향의 풍경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으로 작업을 의뢰했기에, 건물 용도는 ‘환경, 농업, 관광, 비즈니스를 위한 자원을 수용하는 것’ 정도로만 정해진 상태였다. 이에 건축가도 쓰임이 정해지지 않은 공간을 계획하기로 한 것. 모더니즘적인 ‘보편적 공간’ 안에 다양한 크기와 비율의 공간을 구성하되, 미스가 그러하였듯 각 부분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하여, 추후 건축주가 각 공간에 어울릴 만한 기능을 역제안 할 수 있게끔 한 사례다.
‘대만 타이중 공항 도시’는 한층 더 넓은 범위를 대상으로 한 프로젝트로, 공항과 가깝다는 지역적 특성을 반영해 공중에서도 도시를 경험할 수 있게끔 디자인했다. 상업 공간과 항공우주 연구공간, 생태공간으로 도시 프로그램을 분류한 뒤, 이를 몇 개의 기하학적 노드를 중심으로 배치하고 각각의 존을 연결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를 통해 도시의 공간들을 큰 규모로 나누는 동시에, 작은 공간들과도 이어지며 관계 맺는 것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와이팅이 강조한 ‘중간을 바로 세우기’가 잘 드러나는 프로젝트라 할 수 있다.
강연을 마무리하며 짧게 진행된 질의 시간에는, 제시된 이론과 제안이 서울이라는 환경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얼마나 유효한지에 대한 건축가들의 질문이 많았다. 이에 대해 와이팅은 미국과 한국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답했다. 두 국가 모두 자유주의 체제이며 자본과 상업이 깊게 침투한 사회이고, 도시 공간의 개발이 국가적 차원뿐 아니라 사적인 범주에서도 일어난다는 점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상황이 유사하다는 이 말에는 이견이 많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와이팅이 제시한 ‘중간 영역의 도시주의’와, 이를 위한 전략 세 개는 대부분의 도시에 적용이 가능해 보인다. 결국 보편적 가치를 위한 보편적 해답은 존재하기 때문이다.